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우보이 비밥 (문단 편집) === 결말과 메시지 === [include(틀:스포일러)] [[스파이크 스피겔|스파이크]]가 [[줄리아(카우보이 비밥)|줄리아]]를 만나고 [[비셔스(카우보이 비밥)|비셔스]]와 결판을 짓기까지는 이 작품의 궁극적인 메시지가 담긴 중요한 내용이다. 작중 본편 이전의 시점에서, 스파이크는 줄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꿈꿨다. 그리고 훗날 약속 장소[* 스파이크와 줄리아가 재회하는 약속 장소는 [[공동묘지]]다. 이러한 [[미장센]]이 그들의 [[현실도피]]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에서 재회하여 그 꿈을 이루기로 약속하고 헤어지지만, 비셔스의 협박 때문에 줄리아는 약속 장소에 오지 못하고 잠적해버린다. 이 때문에 스파이크는 뜻하지 않은 심리적인 충격을 받는다. 이후로 스파이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닌 '나쁜 꿈'으로 여기며 깊은 허무감에 빠지게 되고, 과거를 잊은 체하며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줄리아의 이름이라도 들려오는 순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하여 줄리아를 찾는 데 열중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스파이크가 줄리아를 자신의 '나쁜 꿈'으로부터 [[구원]]해줄 존재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스파이크는 현실의 '부조리'를 맞닥뜨리자 그것을 외면하고 현실로부터 도피하며 깊은 권태감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스파이크의 심리는 17화 "머쉬룸 삼바"에서 스파이크가 겪었던, 목적도 이유도 없이 하염없이 올라가는 '끝없는 [[계단]]' 환각으로 은유되어 나타난다. [[페이 발렌타인|페이]]로부터 '그곳에서 기다리겠다'는 줄리아의 메시지를 전해 받은 스파이크는 비밥 호를 떠나 줄리아와 재회한다. 그리고 이번엔 진정으로, 두 사람이 꿈꿔왔던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함께 떠난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의 '꿈'이 실현되려는 도중, 추격해 온 비셔스의 부하가 쏜 총탄에 의해 줄리아가 사망한다. 되찾은 과거와 이루고자 했던 꿈을 허무하게 잃어버린 스파이크는 그토록 부정하고 외면해왔던 '현실은 꿈과 달리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만은 없다'는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각성하게 된다. 그리고 '과거'가 아닌 '현재'를 바라보는 오른쪽 눈으로 하늘을 노려본다. 줄리아가 죽은 후, 스파이크는 비셔스에게 가기 전 마지막으로 비밥 호에 돌아온다. 그리고 제트에게 '[[100만 번 산 고양이]]'의 내용을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내용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는 사실상 스파이크 자신과 줄리아의 이야기와 같다. 이후 이어지는 농담인 “난 이 이야기가 싫어. 나는 고양이가 싫거든.”이라는 말은 과거와 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죽은 고양이와 달리, 자신은 그 굴레로부터 벗어나 현실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겠다는 뜻을 은유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고양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고양이를 싫다고 하는 스파이크의 말은 그 뜻이 상당히 복잡미묘하다. 비셔스를 죽이러 가기 직전의 스파이크가 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다시는 이전처럼 살지 못할(않을) 것'을 암시하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동화 속의 고양이처럼 죽음을 맞이하여 살지 못할 것임을 뜻할 수도 있고, 반대로 고양이와 달리 모든 걸 잃고도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비밥 호를 완전히 떠나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고양이를 싫다고 말함으로써 자기혐오를 은연중에 내비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직전의 에피소드인 25화에서 제트가 스파이크에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인 '킬리만자로의 눈'을 얘기한 것에 대한 스파이크의 대답이기도 하다. 제트가 킬리만자로의 눈 줄거리를 설명하고 나서는 '''“난 이 이야기가 싫어. 남자는 과거 얽매여 있어. 죽음 앞에서 필사적으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찾듯이 말이야.”'''라고 말했는데, 정확히 스파이크도 '100만 번 산 고양이'의 줄거리를 이야기하곤 "''“난 이 이야기가 싫어'''. 나는 고양이가 싫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스파이크는 제트가 싫다던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남자처럼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떠난다.] 마지막으로 ''' ''“[[줄리아(카우보이 비밥)|여자]]를 위해서냐”'' '''라고 질문하는 제트의 말에 스파이크는 ''' ''“죽은 여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고 대답하며 떠나려 한다. 이는 그저 줄리아에 대한 복수, 즉 좌절된 꿈과 과거에 미련을 품고 되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통로 옆에서 기다리던 페이는 비밥 호를 떠나려는 스파이크에게 총을 겨누며 막아선다. 페이는''' ''“과거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네가 말했지만, 오히려 네 쪽이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느냐, 목숨을 버려도 괜찮다는 거냐”'' '''며 스파이크에게 질문한다. 그리고 스파이크는 페이에게 자신의 눈을 들이 밀며''' ''“내 한쪽 눈은 사고로 잃어버려 만든 눈이다. 그때부터 난 한쪽 눈으로는 과거를, 다른 한쪽으로는 현재를 바라본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현실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깨지 않는 꿈을 꾸려 했는데 어느 순간 깨고 말았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다. 그저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러 가는 것이다”'' '''라고 대답하며 떠난다. 이는 스파이크가 비로소 현실을 직시했음을 의미한다. 비셔스를 죽이는 것이 그저 줄리아를 위한 복수가 아니라면, 스파이크는 굳이 비셔스를 찾아가지 않고 다시 비밥 호에서 살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스파이크에게 있어 현실에 굴복하는 자기파멸에 불과하다. 스파이크에게 있어 줄리아는 '과거의 낭만'과 '꿈'을 상징한다. 스파이크는 줄리아와 함께 살아가는 것만이 현실로부터의 구원이라고 여겼고, 줄리아가 행방불명되자 오랜 기간 동안 현실감을 잃고 깊은 권태와 비관에 빠져들어 관성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스파이크가 행방불명된 '꿈'을 되찾아 추구해왔던 삶을 실현하려는 순간, 비셔스에 의해 그 '꿈'이 영구적으로 파괴되고 만다. 따라서 스파이크에게 있어 비셔스는 '현실의 [[부조리]]'를 상징한다. 스파이크는 자신의 관성적인 삶을 지탱하던 기반(꿈)이 완전히 파괴된 뒤에야 비로소 현실을 깨닫는다. 본인이 말했듯 '깨지 않는 꿈'을 꾸려 했는데 '꿈에서 깨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은 자연스레 스파이크로 하여금 관성적인 삶을 거스르는 능동성과, 현실을 직시하고 대항하는 응전력을 지니게 되는 반작용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스파이크가 현실을 깨달은 이상 그는 과거의 [[권태]]가 배어있는 비밥 호를 필연적으로 떠날 수밖에 없고, 동시에 자신을 옥죄는 부조리 그 자체인 비셔스를 죽이러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파이크가 자신 스스로 말했듯,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있는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스파이크에게 있어서 비셔스와의 싸움은 행위 그 자체로서 곧 '생의 증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파이크는 '과거의 수복'에 초점을 맞춘 제트와 페이의 질문을 모두 부정하고, '현재의 현실'을 쟁취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대답하며 자신의 싸움을 '''복수'''가 아닌 '''투쟁'''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마음을 지닌 스파이크가 비셔스에 맞선다는 것은 현실의 부조리를 타개하고 과거를 청산하여 자주성을 되찾아보이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혹은 투쟁 그 자체와 그에 수반되는 고통과 희열을 느끼는 것 모두 '죽어있는' 자는 할 수 없고 '살아있는' 자만이 가능한 것이기에, 투쟁을 통해 자신이 능동적 주체로서 '살아있음'을 스스로 증명하여 확인하겠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스파이크는 레드 드래곤에 쳐들어가 비셔스를 마주한다. 이때 비셔스는 스파이크에게 ''' ''“이제야 꿈에서 깨어났나? 언젠가 말했었지. 너를 죽일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라고 말하고, 스파이크는 비셔스에게''' ''“그 말 그대로 너에게 돌려주마. 우린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라고 말한다. 이 대화에서 비셔스 또한 스파이크와 비슷한 처지였음을 알 수 있다. 비셔스는 줄리아와 스파이크의 배신으로 인해 타락하여 그들을 죽일 힘과 능력을 얻기 위해 권력에 집착했고, 스파이크는 줄리아의 잠적으로 인해 현실감과 삶의 목적을 상실했다. 비록 방향은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줄리아 한 사람의 존재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삶이 달라져 버린 것이다. 여기서 '나만이 널 죽일 수 있다'는 두 사람의 대화는 '스스로만이 자기 자신을 과거로부터 구원할 수 있음'을 함의하며, 서로가 줄리아라는 교집합으로 얽혀있는 '끊어내야만 하는 연결고리'와 같은 존재임을 은유한다. 각자의 무기가 서로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 ''“줄리아는 죽었다. 끝을 내자.”'' '''라는 스파이크의 말과, 그를 긍정하며 맞받아치는 비셔스의''' ''“좋을 대로.”'' '''라는 말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각자의 삶이 담겨있는 상징적인 무기인 권총과 검을 서로에게 밀어주며 마지막 공격을 가한다. 이 또한 서로에게 '나만이 널 죽일 수 있다'고 말한 두 사람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스파이크가 쏜 총에 의해 비셔스가 즉사하고, 스파이크도 몸통을 크게 베이는 중상을 입으면서 싸움이 끝난다. 싸움이 끝난 뒤, 스파이크는 하늘을 바라보며 줄리아와의 마지막 대화를 회상한다. 줄리아가 죽을 때 스파이크에게 남긴 유언인''' ''“이건... 꿈이지?”'' ''' 라는 말은 도피뿐이었던 이전의 시간들은 있는 그대로의 살아있는 현실이 아닌 과거의 허무한 꿈과 다를 바 없었음을 뜻하며, 그것을 긍정하며 ''' ''“응, 나쁜 꿈이야”'' '''라고 대답하는 스파이크의 심리는 ''''더 이상 사라진 과거의 꿈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극복하겠다''''는 다짐을 내포한다. 그리고 스파이크가 비셔스를 처단한 뒤에야 '오른쪽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이 대화를 회상한다는 것은 스파이크가 그 다짐을 실천하는 데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던 스파이크는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임에도 미소를 짓는다. 이는 스파이크가 투쟁이라는 행위 그 자체로써 능동적 태도를 스스로 증명하여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했고, 결국 비셔스를 제거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타개하는 데 성공하며 스스로를 완전히 해방시켜 [[자유]]를 얻어낸 것에 대한 행복이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은 삶의 의지와 열망이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이겨낸 것으로도 볼 수도 있다. 즉 자신의 말대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자아실현을 이룬 것에 대한 행복을 느낀 것이다. 이토록 스파이크가 환각 버섯을 통해 무의식 속에서 목적도 이유도 없이 하염없이 올라가던 무한한 계단은 현실에서 줄리아의 죽음을 통해 비셔스라는 종착지가 있는 계단이 되어 나타났고, 스파이크는 계단의 끝에 올라 목적을 실현한다. 따라서, 이 다음 스파이크가 '[[현재]]를 바라보는' 오른쪽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마지막으로 남긴''' ''‘BANG!’'' '''은 '현실은 나에게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고통[* 이는 줄리아와 그녀의 사망으로 상징된다.]을 줬지만, 난 그에 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 이는 비셔스로 상징된다.]에 맞섰다'는 자축과 반항이 섞인 제스처이자, '''‘과거의 상실은 현재를 획득하는 것으로 극복된다’'''는 작품의 궁극적인 주제의식을 무형의 총탄으로 승화시켜 시청자들의 마음에 박아 넣은 것이다. 어쩌면 '''‘현실을 삶으로써 꿈을 성취하라’'''는 직격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스파이크의 'BANG'이 쓰인 방식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이것은 이미 6화 '타락 천사를 위한 발라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번 나온 적이 있었는데, 마지막 회의 'BANG'과는 그 성질과 의미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6화에서 자신에게 '죽음에 대해 아느냐'는 질문을 남기고 사망한 웬을 지켜보던 스파이크는 '알 리가 없지'라고 무심하게 혼잣말로 대답하고, 웬의 유품인 하모니카를 공중에 던진 뒤 손가락으로 겨냥하며 'BANG'이라고 읊조린다. 이는 비로소 현실의 섭리와 그에 따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웬의 모습과,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냉소적 제스처를 취하는 스파이크의 모습을 통해 스파이크의 최후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메시지 전달 과정은 모두 작품의 바깥의 현실 세계를 직접적으로 향하지 않고 '작품 속 세계'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그 메시지는 간접적, 은유적으로 전달된다. 그런데 마지막 화에서는 주인공 스파이크가 자신의 숙원을 모두 청산한 뒤, 자신과 같은 작품 속 사물이나 등장인물이 아닌 '''화면 밖의 시청자를 직접 겨냥'''한다. 작품 전체에 걸쳐 다양한 화법을 통해 암시적으로 누적해온 주제의식을 주인공의 행동으로 승화시켜 표면화하는 동시에, 주인공이 그 교훈의 대상으로 작품 바깥 세계에 실재하는 시청자들을 직접 가리키는 단도직입적인 연출이다. 또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던 스파이크가 본인의 뜻을 실현하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여 진정으로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상태가 됐기에, 6화의 냉소 섞인 'BANG'이 아닌, 진정으로 기쁨의 미소가 섞인 'BANG' 제스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혹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웬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던 스파이크가 스스로 살아있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웬처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토록 마지막 화의 'BANG'은 '실존'이라는 총체적인 주제의식을 완성시키는 장면인 동시에, '작품 내 세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표현해오던 이전의 에피소드들과는 달리 주인공을 통해 [[제4의 벽]]을 깨고 '작품 밖 세계'에 있는 시청자들을 향해 메시지를 직접 표현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작품의 메시지는 그토록 갈구하던 과거를 되찾았으나,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현실만 마주하게 된 페이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스파이크와 페이는 둘 다 과거를 영구적으로 상실했지만, 두 사람의 결과는 대비되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페이는 그 어떤 가치조차, 심지어 자신이 짝사랑하던 스파이크조차 얻지 못하고 허망함만이 증폭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생존하여 삶의 가능성을 남겨둔 반면, 스파이크는 투쟁을 통해서, 혹은 투쟁이라는 행위 그 자체로써 삶의 가치를 얻어냈지만 되려 그 때문에 사망한다. 즉 페이는 '결국 갈 곳은 여기밖에 없었다'며 비밥 호로 돌아오긴 했지만, 스파이크가 미처 누리지 못한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실현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카우보이 비밥은 작품의 메시지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고, 인물들의 결점과 불안정함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무의식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그 결점 많은 주인공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이는, 따라서 일차적으로 보이는 부분과 그 안에 내포된 이야기가 상반되는, 은유적인 방법으로 메시지를 표현한다. 그것을 정답으로 결론짓지도, 시청자들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뿐, 가치 판단과 그 해석은 감상하는 시청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